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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비박이란...

하눌이 2007. 8. 13. 12:22
비박장비/천국과 지옥 사이에서 잠들다

글 김수석 객원기자·icamp4.com 운영자




비박(Biwak·독/Bivouac·프)이라는 말은 원래 군대가 야영을 할 때 경계병이 불침번을 서며 사주를 경계하는 행위를 나타내는 독일어[Bi(주변) +Wache(감시하다)]에서 유래한 말로 등산에서는 보통 텐트를 사용하지 않는 일체의 노영을 뜻한다.
“올라갈 때는 청년이었는데 하룻밤 사이에 노인이 되어 내려왔다."
알피니즘의 역사상 가장 초인적인 비박은 1953년 헤르만 불(Hermann Buhl·1924~1957)이 히말라야의 낭가파르바트(8125m)에서 한 그것일 것이다.
수직에 가까운 경사 때문에 상부에 눈이 쌓이지 않아서 ‘벌거벗은 산’이라고 불리는 이 산은 헤르만 불에 의해 최초로 등정되기 전까지 무려 31명의 목숨을 앗아간 마의 산이었다.
남동쪽에 4500m 길이의 수직벽인 루팔벽을 안고 있기에 현재도 극한을 추구하는 등반가들이 언제나 마음에 담고 있는 숙명의 산이기도 하다.
헤르만 불의 등반은 산악인들에게는 영원한 신화이다.
지금부터 50여 년 전 그는 셰르파도, 산소통도, 파트너도 없이 8000m에 도전해 41시간 동안의 투쟁 끝에 등정에 성공하고 생환한다.
하산 길에서는 절벽에 등을 기대 선 채로 밤을 지새우고, 잠깐 졸았다가 깨어날 때 마다 자신이 서있는 곳이 어디인가를 깨닫고 놀라게 된다.
이 등반의 상황묘사는 <8천미터의 위와 아래·원제 8000m Druber und Drunter>(헤르만 불 저/김영도 역/수문출판사/1996/ 국내완역판)라는 이름의 명저로 우리에게도 잘 알려져 있다.
비박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헤르만 불의 등반으로 말문을 여는 것은 그것이 비박의 한쪽 측면, 즉 예기치 못한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경우를 극명하게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극한의 난이도를 추구하는 현대 등반에서는 짐을 가볍게 하고, 속도를 높이기 위해 처음부터 비박을 계획하는 경우가 많다.
세계 등반사조의 흐름은 대규모 원정대를 동원해 목표를 향해 차례로 캠프를 설치해 접근하는 방식인 극지법(Polar Method)에서 소규모, 경량, 속공이 특징인 알파인 스타일(Alpine Style)로 판도가 변화한 지 오래다.
전진캠프나 고정로프를 설치하지 않고 정상 등정 후 베이스캠프로 복귀하는 계획이라면 대상지가 어디건 간에 비박은 거의 필수적이다.



한편, 일반 등산객들 사이에서도 비박이 빠르게 퍼져가고 있는 것은 야영에서는 느낄 수 없는 비박만의 독특한 정취 때문이다.
알퐁스 도데의 「별」에 나오는 양치기의 독백처럼 ‘만일 한번 만이라도 한데서 밤을 새워 본 일이 있는 사람이라면, 인간이 모두 잠든 깊은 밤중에는 또 다른 신비로운 세계가 고독과 적막 속에 눈을 뜬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자연의 한가운데에서 밤을 보내는 것은 똑같지만 밤하늘의 별과 얼굴을 스쳐가는 바람, 귓전에서 들리는 풀벌레의 울음소리는 비박의 정취를 더욱 특별하게 만들어준다.
비박은 이렇듯 상황에 따라 여러 가지 종류가 있지만 방수천막과 침낭, 침낭덮개와 매트리스까지 완비된 호화로운 비박이라면 지나치게 많은 짐을 챙기지 말라는 것 이외엔 이야기할 거리가 많지 않다.
어차피 등산의 한 요소인 불확실성이 최소화된 이른바 ‘준비된 비박’이기 때문이다.
비박을 계획하지 않은 산행이라고 할지라도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비박에 대한 최소한의 준비가 있어야 한다.
비박은 등반자의 경험, 기술, 체력, 대상지, 등반 조건, 인원, 계절 등 모든 변수들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다.
모든 악재는 한꺼번에 밀어닥치고 산에서도 그 점은 마찬가지다.
미리 대비가 되어있다면 다행이겠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냉철한 판단을 유지하면 화를 막을 수 있다.
길을 잃었다고 해서 당황한 채로 무조건 움직이다 보면 긴장감 때문에 급격하게 체력이 저하될 뿐만 아니라 판단력마저 흐려져 같은 장소를 맴도는 소위 환상방황(環狀彷徨·Ringwanderung)을 피할 수 없다.
부득이하게 비박을 해야 한다고 판단했다면 해가 저물기 전에 일찍 하는 것이 좋다.
쓸데없는 체력소모를 막고 최적의 장소에서 주변의 지형지물을 최대한 이용하기 위해서는 어두워지기 전에 결정하는 것이 좋기 때문이다.
비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체온을 유지해서 저체온증(Hypothermia)을 막는 것이다.
젖은 옷을 입고 잠이 드느니 차라리 알몸을 문질러가며 밤을 새는 것이 낫다.
수면 중에는 모든 신진대사가 저하되기에 체온 또한 떨어지기 마련이다.
고열량의 비상식이나 뜨거운 차가 있으면 아무리 피로해도 먹는 것이 체온유지에 도움이 된다.
여분의 양말은 장갑으로 사용하고 수건은 목도리나 두건처럼 사용해 체열방출이 가장 많은 두부를 감싸주어야 한다.
주변의 나뭇가지, 나뭇잎 등은 매트리스 대용으로 사용하고 빈 배낭으로는 발을 감싸준다.
이렇듯 가장 작은 것마저 이용해야할 급박한 상황에서 비박용 장비가 미리 준비되어 있다면 크게 도움이 될 것은 물론이다.



이런 상황에서 가장 요긴한 물건이 바로 써모 블랭킷(Thermo Blanket)이다.
이는 가볍고 얇은 은박 시트로 방수와 방풍이 되기에 바닥에 깔아 아래로부터 올라오는 한기를 막거나, 위급 시 뒤집어쓰면 바깥의 한기를 차단하고 내부의 열을 반사시켜 간직하는 역할을 한다.
가격도 싸고 휴대성이 좋아 어떠한 산행이건 미리 준비하는 것이 바람직한 좋은 장비이다.
때문에 아웃도어 문화가 발달한 외국에서는 필수품으로 간주되어 편의점이나 약국, 잡화점 등 어디에서도 쉽게 살 수 있지만 아직 우리나라에서는 일부 등산장비점에서만 구할 수 있다.
무게가 더 나가지만 방수천막도 유용하다.
이런 방수천막을 흔히 타프(Tarp)라 부르는데 이것은 방수처리한 합성수지인 타포린(Tarpaulin)에서 나온 말이다.
타포린은 원래 배의 돛으로 사용되던 무거운 천으로 타르 칠을 해서 방수력을 높인 캔버스 천을 부르는 명칭이었지만 현재는 다양한 기법, 재질로 제작되고 사용처도 무궁무진하다.
타프의 재질 또한 다양한데 등산에서는 가볍고 방수력이 뛰어나며 내구성이 좋은 나일론 타프타에 방수 코팅처리를 한 제품들이 주로 사용되고 있다.
아무리 준비성이 철저한 사람이라도 가벼운 당일산행 일정에 매번 침낭을 준비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가격이 비싸긴 하지만 방수·투습 기능이 있는 침낭커버나 비박 색(Bivouac Sack)은 비박 시 큰 도움이 되며 휴대하기에도 부담이 적다.
비를 피할 처마가 없는 상태에서 적어도 더 이상 비에 젖을 걱정이 없다는 것만 해도 얼마나 다행스러울 지를 상상해보라. 철저한 사전계획으로 이루어지는 원정시의 비박이나, 그 자체가 낭만일 수밖에 없는 준비된 비박, 그리고 예기치 못한 상황에서 겪게 되는 부득이한 비박 등 비박이라는 등산행위에도 여러 가지 양상이 있지만 풍부한 경험과 상황에 맞는 적절한 준비가 있을 때만 성공할 수 있는 것은 어느 경우라도 마찬가지이다.
그것이 계획한 만큼의 원활한 등반이건, 기대했던 만큼의 즐거움이건, 그 무엇보다 살아남는 것 자체이건 간에 이 모두가 준비된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자.
출처 : 비박이란...
글쓴이 : 하눌(주양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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